경칩 날의 고산 골 산책

오늘은 3월 6일 절후 상 무술년 경칩 날이다.
경칩은 겨울잠을 자던 벌레들이 놀라 깨어난다는 뜻으로 입춘, 우수가 지나도 머뭇거리고 있는 동장군에게 마지막 날리는 봄의 전령이며 경고다. 개구리가 얼음이 갓 녹은 실개천을 누비며 암놈의 등에 엎여 물놀이를 즐기고 버들강아지가 시기하듯 고개를 젓고 있다. 개나리 진달래가 기지개를 펴며 대문간 자목 란 꽃 깍지가 터지며 살며시 내다보고 있다.

일주일 전 전직 동료였던 K님이 생각이 나서 보고 싶다고 전화를 했었다.
오는 경칩 날 11시 반에 고산 골 관리사무소 앞 벤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K님은 나보다 세 살 아래로 전직 동료인데 그는 나를 선배라고 형으로 부른다. 벌써 내가 정년퇴직 한지가 33년이 되었고 내가 나온 후 그는 시립복지관으로 전직하여 10여년을 더 근무하다가 은퇴한지가 20 여년이 흘러갔지 싶다. 은퇴 후에도 서로 자주 전화로 안부를 묻기도 하고 함께 산행을 하면서 구정의 추억에 젖기도 했었는데 약 3년 전부터 소식이 뜸해졌다. 해가 바뀌고 명절이 되어도 내가 먼저 안부 전화를 해야 겨우 받는데 말소리가 밝지 못했다. 아마 건강이 좋지 않을 것이라 느낌이 들었다. 3년 전에 나의 수상록을 부쳤다. 그 글 속에는 그의 얘기도 들어있었는데 잘 읽었다는 간단한 문자 메시지만 왔었다. 올 설에도 소식이 궁금해서 내가 먼저 안부 전화를 했다.

나는 귀가 멀고 그는 말이 어둔해서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나도 날이 갈수록 달라지는 건강에 기동 할 수 있을 때 그를 한번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일주일 전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좋다면서 고산 골 옛날 산행 시 만났던 관리사무소 옆 벤치로 약속했다. 끓인 물을 담은 보온통과 커피 믹서 4개, 신문, 근래 쓴 프린트 한 수필 3편, 일기장 그리고 카메라를 배낭에 넣고 집에서 10시 15분에 출발을 했다. 새벽 최저 기온이 영하 1도이고 낮 기온은 영상 11도까지 올라간다는 일기 예보인데 산기슭 바람이 볼을 때려 덮개로 머리를 감쌌다. 앞산 순환도로를 돌아 고산 골 들목에 이르니 남구 체육센터 기초공사를 하고 있었다. 9홀의 파크골프와 테니스장을 위시해 근린체육공원을 조성한다는 공사개요 안내판이 눈길을 끌었다. 약속시간이 30분 쯤 여유가 있어 입구 초소로부터 인도 가편에 전시된 봄에 대한 시를 읽으면서 천천히 걸었다. 이해인 시인의 “봄이 오는 소리” 등 봄을 찬미하는 아름다운 시가 담긴 푯말 천이 따뜻한 햇살을 맞아 윙크를 했다. 중간 중간 세워는 푯말 시를 하나하나 음영하면서 걸었다. 남구국민 체육센터, 어린이 놀이터, 깨끗하게 포장된 도로와 주차장, 너무나 달라진 환경에 옛날 오르내리든 때의 주위환경이 떠올라 감회가 깊었다.

40년 전 대명동으로 이사한 이후는 주로 큰골을 이용해서 이곳 고산 골은 오랜 만에 걷는 길이다.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11시25분 약속시간 5분전이었다. 주위를 살펴봐도 K님은 보이지 안 해 벤치에 앉아 신문을 펼쳤다. 약 10분이 지나도 오지 안 해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 후에 올라오는 중이라는 대답이었다. 내가 와 있다면서 천천히 오라고 이렀더니 뭐라고 말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신문을 읽다가 고개를 드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눈 익은 모습이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보였다. 그였다. 김샘! 하고 소리를 질렀다. 너무 반가워 부둥켜안았다. 그의 눈에 눈물이 걸씬거렸다.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건강이 많이 나빠 보였다. 얼굴에 부종기가 있고 말도 어둔 했다. 스틱을 짚은 걸음걸이도 바르지 못했다. 벤치에 앉아 그 간 안부를 물으며 가지고간 보온통의 물에 커피를 믹서해서 음미하면서 정담을 나누었다.

올해 85세인 그는 D상고 출신으로 재직 시 경리업무를 줄 곳 맡아 봤으며 검도 선수로 전국대회 참여와 직장 대표선수로 일본까지 다녀왔었다. 배구와 탁구도 수준급으로 직장 대회 시는 심판까지 했었다.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펄펄 날던 그였다. 나는 보청기를 꼈으나 그는 아직 보청기는 끼지 안했다. 나 보다 귀는 밝았다. 그의 말이 어둔해서 잘 알아듣지 못해 필담으로 메모 대화를 했으나 손이 떨려 필담도 어려웠다. 백내장 수술 후유증으로 시력도 나빠 책은 물론 신문도 안본다고 했다. 고혈압에 당뇨, 심장질환까지 합병 되어 현재 복용하고 있는 약이 열 종류가 넘어 빠져먹기도 한다고 했다. 3년 전에 내가 우송한 수상록에 김샘 얘기도 들어있는데 읽어 봤느냐고 물었더니 읽기는 다 읽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치매검사를 했는데 약을 복용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단다. 남의 일 같지 안 해 숙연해져 자꾸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가지고 간 일기장도 보이고 프린트한 수필 “황혼을 아름답게” 외 2편의 글도 읽을 형편이 아니었다. 집에 가지고 가서 부인으로 하여금 읽게 하겠다면서 주머니에 접어 넣었다.

지난 해 이 때 내가 가장 사랑했던 열여섯 아래인 후배가 갔고 연달아 퇴직자 모임의 회장직으로 3연임을 하면서 홈페이지 구축 등을 함께 했으며 같은 아파트단지에서 형제처럼 지낸 j님도 나보다 넷 살 아래인데 가버렸다. 이제
나의 유일한 친구이자 후배인 k님 까지 이렇게 건강이 나빠졌으니 모처럼 만난 자리가 숙연하고 무거웠다. 많은 추억담이 산 같이 많으나 그는 말이 어둔하고 나는 귀가 어두워 마음에 담아온 얘기를 다하지 못했다. 그럭저럭 오후 1시가 지나고 있었다. 애초에 나는 그와 함께 멀리는 못 올라가도 법장사 위 계곡 바위에 앉아 며칠 전 내린 비로 불은 물줄기를 바라보며 더 추억을 불러오기로 마음먹었는데 아니었다. 아쉬웠으나 그의 손을 잡고 내려왔다.

팔군 정문 앞 대봉동에 살 때 이 고산 골을 오르내린 추억 들이 뇌리를 스쳐 갔다. 공룡 공원이 들어서고 들머리 식당골목도 정비되어 격세지감이었다. 함께 식사라도 나누려고 식당 간판을 두리번거리다 마침 들깨죽이 눈에 띄어 어떠냐고 물었더니 좋다고 했어 들어가 2인분을 시켜 먹었다. 들깨 냄새가 구수하고 쫄깃한 찰 수제비가 그런 대로 먹을 만 했다. 1인분 3천원으로 예상외 헐했다. 라면도 3천원인데. 오랜만에 만나 고기 맛이라도 보면서 대접하려고 했어나 그도 그렇고 나 또한 소화 기능에 좋지 못해 외식은 일체 삼가고 집에서 아내가 내 구미에 맞춰 주는 음식에 소식을 하며 간간이 잣죽으로 때우는 편이라 죽을 택했는데 그도 나와 비슷한 식성으로 3천 원짜리 들깨죽이 육식의 성찬보다 입에 맞았다. 바로 옆자리에는 70대 노인이 파전에 불로주와 맥주를 겹쳐 시켜놓고 혼자 마시고 있어 외로워보였다. 뒷자리에는 등산복 차림의 중년들이 막걸리에 부추 전 안주로 호기를 부리고 있었다. 우리도 저렇게 한잔 술의 취기에 젖은 적이 있었는데 그분들이 부러웠다. 그도 그렇고 나 또한 술과는 거리가 머나 오늘 같은 날은 저렇게 취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식당을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주위의 정경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대로변 버스 정류소까지 걸었다. 자택이 전에 내가 가봤던 그 집이 아니고 이사를 했다는데 버스를 2코스나 갈아타야한다고 했다. 아파트가 아니고 역시 단독주택 이라했다. 자가용도 몸이 저러니 처분해버리고 이제는 방콕 신세가 되고 말았다고 쓴 웃음을 지었다. 남매를 키워 아들은 대학 시간 강사인데 교수발령을 못 받고 있단다. 나와 같이 20년 반액 연금으로 살자니 부부생활이 빠듯하단다. 다행히 부인이 10년이나 젊어 노후 돌보기를 해주고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저렇게 불편한 몸인데도 나의 청을 거절치 못해 나온 분에게 3천 원짜리 들깨죽으로 때우기는 너무 섭섭하고 미안했다. 지갑에서 세종대왕 2장을 꺼내 한사코 거절하는 그의 주머니에 넣어주면서 내년 경칩 날 오늘 만난 그 자리에 다시 꼭 만나자고 손 벽을 친 후 버스 타지 말고 택시 타고가라고 등을 밀었다. 돌아오는 50분 도보길에 밀려오는 쓸쓸함을 떨칠 수 없었다.

2018년 3월7일 우롱 씀